그렇다. 지금까지 무탈히 지낼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나에게 '빚'이 없다는 사실이었고, 또 그에 비해 벌이의 수준이 나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아이가 둘이 생기고, 육아에 전념하겠다는 아내는 평생 꿈의 직장이었던 은행을 제 발로 걸어 나왔다. 아니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나의 설득도 있었고 그게 큰 부분 작용했다. 아이들 곁에는 엄마가 늘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적인 생각과 내 유년시절의 경험이 지금의 내 삶과 전혀 무관치 않을 것이고 그로 인한 정서적인 혜택이 나의 성장에 주요했던 점이었다.
그러던 가운데 나의 이직이 있었고, 지출을 통제하는 삶 속에서 나름의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청약의 당첨은 앞으로의 예고된 확정지출의 범위를 가늠케 하는 큰 사건이었고, 어느 정도이든 '빚'을 질 수밖에 없고 우리 가족의 생활범위가 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음이 뚜렷이 보이는 사건이었다. 계약금을 내고, 여섯 차례에 걸친 중도금 납부의 주기는 물리적 시간 대비 체감적으로 빠르게 다가왔으며 한두 차례에 걸친 이 작업들을 수행하면서 '빚'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둔감해졌다.
체념을 한 것인지, 훗날 이 자산의 가치가 못해도 두 배 이상은 오를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린 이 모든 상황들을 내가 벗어날 방법은 없다는 사실은 너무 명확했다. 또한 저렇게 좋아서 방방거리는 아내의 마음에 제동을 걸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때로는 그런 감정의 파고에 나도 몸을 실어보고 싶기도 했다.
정말 그만한 가치가 있는, 그것도 투자의 목적이 아닌 실거주의 목적으로 한 청약이라는 것이 이 정도의 금액을 투입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는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물론 최근 하자보수 여러 건들을 처리하고 조금씩 구색이 갖추어져 가는 '나의 집'을 보면 뿌듯하고 안정된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해와 바람이 잘 들고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관악산과 청계산의 모습은 특히 비가 오는 날 더 아늑했다. 시야가 트였고, 좋은 생각들이 들었으며,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겠다는 기대 어린 상상을 하기도 했다. 당장 이틀 뒤부터 원금과 이자가 은행으로 향하겠지만 잠시나마 머무른 나의 통장에 흔적 정도는 남길 수 있으니, 한 달간 열심히 일한 연유로 이 삶을 유지하는 것도 늘 불만 서린 것은 아닐 수 있겠다 싶다.
언제가 되었건, 아니 꽤나 빠른 시기에 오르길 기대해본다. 적어도 오랜 기간 가슴 졸이며 철렁 내려앉는 가슴으로 송금을 해오던 나의 마음에 큰 위안이 되어줄 유일한 해법이 그것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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