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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 앞에서

부부의 세계

by Experience-teller 2024.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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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제법 가사의 참여와 각자의 역할 구분이 명확해졌고 나는 꽤나 적극적이 되었다. 이른 새벽 기상을 하는 나는 첫째가 학교에 가야 할 준비를 할 때 즈음, 설거지 및 집안 청소를 시작하며 하루의 출발을 알린다. 덕분에 둘째의 기상과 취침시간도 첫째의 일과에 맞춰졌다. 뭉개지고 포개져 있는 빨래들을 본지도 오래되었다. 조금 쌓이는 꼴이 이렇게나 보기 싫은 것이었는지를 휴직이란 것을 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올 3월 초등학생이 된 딸의 등교를 아내가 담당하고 비슷한 시간대 언저리에 약간의 차이를 두고 둘째 녀석의 어린이집 등원을 내가 맡는다. 의도한 것은 아니나 자연스레 딸은 엄마와의 시간이 더욱 늘었고, 아들은 아빠와 끊이지 않는 대화를 한다. 더불어 우리 부부는 관심사가 서로 다른 두 남매에 관한 이야기를 각각의 등교와 등원 이후 고급 정보를 공유하듯 커피 한잔을 사이에 두고 털어놓는다.

 

 

-오늘 2호가 나한테 뭐라 했는지 알아? 

-아빠가 집 근처에서 일했으면 좋겠다고 하다가, 그러면 벨루가를 보기가 어려워지니 그냥 거기 다녔으면 좋겠대.(회사 인근에 아쿠아리움이 있다)

-3호는 어떻고. 내일은 어린이집 안 가고 하루 종일 아빠랑 물고기 보고 놀고 싶대

-표현이 풍부해졌어. 부쩍.

 

 

 남들이 들으면 별 것 아닌 '그 가족의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특별하고 웃기다. 일곱 살 어린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며 걱정되었던 몇몇 일들은 출산과 육아와 우리 둘의 노화로 별것 아닌 것들로 변했고 같은 눈높이의 대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다행일 때도 있었지만 다급해지기도 했다. 문득 돌아본 부부의 모습은 꽤나 안정을 찾아간 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지만, 그 둘의 인생은 아이들의 삶으로만 채워질 때가 많았으니까. 그리고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으니. 

그래서 육아휴직을 결정했고 아내와의 시간이 늘어났다. 우리의 내일은 어떠할지 모르고, 오늘은 총알같이 지나가기에 할 수 있는 한 나는 나와 아내와 아이들의 시간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싶었다. 이들 인생에 아주 작은 일부분이라 할지라도 그래야 했다.  

 

 등 하원 및 등하교를 함께 하고 자투리 시간에 아내의 팔짱을 끼고 봄을 기다렸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동네 담벼락의 개나리에서 삶의 환희를 느끼며 사랑보다 안정과 평안을 향해 걷고 있는 서로의 모습에 안도하기도 했다. 잠깐씩 주어지는 여유로움을 각자의 취향으로 채워가기도 혹은 함께하기도 하며 오늘에 감사했다. 첫째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지, 또래에 비해 작은 키 때문에 힘들어하지는 않을지, 둘째는 언제쯤 한글을 잘 읽게 될 수 있을지 에 대한 가벼운 고민들을 나누며 이런 평범함이 주는 삶의 만족을 누렸다.

 

 


 그간 묵혀온 일들도 여럿 해치웠다. 장인 장모가 신혼 초기 깔고 주무시던 혼수이불을 물려받아 우리가 쓰고 있는데 워낙 오래된 이불이라 이걸 어찌할까 생각한 끝에 동네에 알아주는 솜틀집에 맡기고 리폼을 강행했다. 사실 그 요물이 우리 집에 온 지도 몇 해가 지났고, 눌릴 대로 눌린 목화솜 이불의 커버의 지퍼는 망가진 지 오래. 이불도 꽤나 묵직하게 변해있었다. 일단 들고 와서 실물을 봐야 견적이 가능하다는 여유로운 주인아저씨의 말씀을 듣고, 집에서부터 이고 지고 가게로 향했다. 붉은 노끈으로 동여맨, 누가 봐도 십수 년 되어 보이는 클래식한 비단 느낌의 두툼한 요를 오른쪽 어깨에 들쳐 메고 동네를 활보하니 느낌이 묘했다.

멀쩡하게 생긴 놈이 평일 대낮에 이러고 다니면 사람들이 뭐라 생각할까 에서 출발하여 37년 된 목화솜 이불을 틀어 새로운 이불과 방석으로 재탄생시키려는 구상을 한 아내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어떻게든 두 분의 흔적을 기억할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나. 조화로운 금요일 정오의 햇살은 만족스러웠다.  

그 이불이 6일 만에 집으로 도착했다. 말도 안 되게 새로운 제품으로 돌아온 자태가 자못 늠름해 보였다. 지금 우리 부부의 삶이 순간순간 헐거워지고 새로워지고 를 반복하며 관록이 쌓여가며 성숙한 나로 살아가는 노선 위에 있다는 생각을 했고, 훗날 우리의 아이들도 부모의 자취를 어떻게든 남기고 싶어 하는 '어른'으로 성장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리폼되어 도착한 방석 4개와 이불의 사진을 찍어 아내에게 전송하며 '문익점 이불' 이 도착했다 기별했고, 별것 아닌 그 표현이 웃긴다며 ㅋㅋㅋㅋㅋ를 아내는 연발했다. 뭐가 웃긴 일인가.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오지 않았다면 혼수로 목화솜으로 누빈 이불을 구경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인데.

 

 


아이들을 학교와 어린이집에 보내고 우리 부부가 가장 많이 한 일은 커피 마시기와 독서였다. 주 2-3회 길 건너 시립도서관(아주 가까이에 도서관이 있다는 것은 실로 행운이다)에 가서 각자 읽고 싶은 책을 보거나 빌려오는 길에 커피도 한잔하고 날씨가 좋으면 만보 정도 걷는다. 시답잖은 장난도 치고 농을 주고받으며(대게는 전혀 기억나지 않을 우스갯소리들) 그렇게 걷다 보면 단축수업 중인 첫째의 하교를 위해 학교 앞으로 향한다. 더러는 아빠나 할아버지가 데리러 오기도 하지만 엄마들의 시선을 피해(굳이 피할 이유도 없는데) 아이를 데려 오는 과정이 처음엔 쉽지 않았다. 아내와 함께 함에도 그러했다. 내 육아휴직의 출발이 첫째의 초등학교 입학이었건만, 일만 할 줄 알았던 아빠의 역할과 육아와 교육에 돌진해야 했던 아빠의 역할은, 내가 대학교 1학년일 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아내와의 나이 차이만큼이나 컸다. 그렇게 서서히 적응할 즈음엔 벌써 3개월이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서서히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옴에 마음이 급해진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도, 딱히 무엇인가 더 많은 것들을 하기에도 애매한 시간인데 지나 온 시간을 복기하면 늘 아쉬움으로 얼룩져있다. 

 

 

시간적 자유를 누리며 성장에 집착하던 인생의 행로에서 다소 벗어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인생에 정답이 없고 장담할 수 있는 일 또한 없지만 내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행복'이었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제도권 내에서 적당한 포지션을 유지하며 금전적인 여유를 느낄 만큼의 연봉을 받고 또한 그런 배우자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으며 그 둘을 닮은 삶의 증거를 세상에 내어놓는 일이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나는 과연 행복한 삶이었을까. 두 아이가 내가 살아온 것처럼 살아가길 원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살다 보면 행복에 이를 수 있을까. 

 

 

우리 부부의 세계에 중심에 있는 바로 그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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