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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 앞에서

이별한 연인과의 재결합 vs 새로운 인연

by Experience-teller 2024.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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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1년간 연애를 하던 후배 둘이 얼마 전 이별했다. 안정적으로 잘 만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남녀 문제는 당사자를 제외하곤 모르는 것이구나 싶었다. 나름의 위로주도 한잔 했었다. 

그리고 오늘, 여자 쪽에서 다시 연락이 와 만남을 이어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결혼 8년 차 된 애들 아빠의 입장인지라 연애라는 감정을 더듬어 보는 것이 생경했다. 한 시간 가까이 통화하고 비슷한 경험을 했던 아주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상황에 대한 정확한 묘사는 어렵겠지만, 감정의 교훈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집착이었는지 아니면 말도 안 되게 불타올랐던 사랑이었는지 가끔 헷갈리게 되는 기억이 있다. 수도 없이 헤어짐을 반복하고 울고 짜고 다시 만나게 되는 이가 있었다. 상처만 남아 만신창이가 된 이후에야 겨우 진정한 이별을 할 수 있었다. 안 되는 걸, 안 맞는 걸,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관계를 지속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한 번의 쉬웠던 헤어짐은, 다툼의 비교적 쉬운 결말로 반복되었고 그렇게 끝을 향해 달렸는데도 쉽게 잠재워지지 못했다. 양쪽 다 그러했다. 

 

 비슷한 상황에 처한 주위 사람들이 조언을 구해올 때, 헤어지고 힘들어했던 그들의 시간에 공감한다면 재결합을 축하해주고 응원해주는 것이 순리겠으나 사실 더 확실한 이별을 하는 것이 맞겠다 싶은 적이 많다. 아니 거의 전부 그러했다. 이별의 사유가 다양하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연애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크게 몇 가지 정도로 축약된다. 그중 하나가 남자 혹은 여자 쪽의 드넓은 인간관계이다. 친구, 선후배, 회사 동료 등 폭넓은 인적 네트워크를 보유한 이들과의 연애는 그렇지 않은 상대방의 철저한 패배로 끝이 난다. 더 큰 비극은 이들의 재결합이 성사되는 순간 시작된다. 누군가의 한없는 이해와 배려, 또 다른 이의 양보와 노력이라는 두 축이 서로의 존재와 성향에 대한 '인정'이라는 범위 내에서 움직일 때 만이 2막을 아름답게 한다. 하지만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니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일반화해본다면, 재결합으로 완전히 달라진 상황을 예상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초반 며칠 애쓰는 것도 버거워지기에 이내 포기한다. 난 그냥 원래 이런 사람임을 상대에게 각인시키고 두배 깊은 상처가 남는다. 첫 번째 이별로 끝났다면 서로에 대한 애틋함과 그나마의 좋은 감정으로 추억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그마저도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비일비재하게 처음의 이별 통을 겪는 가운데 자의든 타의든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의도적이든 충동적이든 새로운 만남은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며, 또 다른 설렘의 가능성의 포문을 여는 시점이다. 문제는 보통 초반이 되는 시기에 발생한다. 새로운 인연과의 만남을 이어갈 때 즈음, 헤어진 연인에게서 연락이 온다. 보고 싶다는 한 마디는 애써 잡아왔던 한 줄기 온전한 정신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그리고 고민이 시작된다. 나를 더 잘 알고 이해해주는 이는 그래도 옛 연인이겠지 하는 생각과, 새롭게 잘 맞춰보고 있는 인연과의 설레는 감정 사이에서의 줄타기가 시작된다. 어느 쪽이 더 나을 것이라고 알려주는 것은 당연히 말이 안 된다. 점쳐보는 것도 쉽지 않다. 다만 결혼이든 연애이든, 훗날 의리와 정 만이 남을 관계라 하더라도 지금의 설렘과 이끌림을 포기하는 것은 내 삶에 주어진 다채로운 사랑의 향기로 채워질 아름다운 그림들을 스스로 차단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아이 둘을 낳고 살이 오르고 강인한 주부이자 학부형이 된 아내에게 변함없는 고마움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사랑'이며, 그 사랑에는 설렘과 이끌림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렇기에 지금의 감정을 숨기고 책임감을 운운하며 되도록 리스크가 적은 선택을 한다면 훗날 후회의 긴 터널을 걷게 될 것이 분명하다. 아, 물론 기본적인 관계의 전제는 사회적, 윤리적, 법적으로 허용된 순수한 남녀 간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외의 상황은 겪어보지 않아 주절거릴 깜냥이 되지 못하기에.

 

 

 다른 성격을 참아내고 맞춰가며 사는 것은 요즘 더더욱 어려운 일인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그렇게 사랑만을 하고 20여 년을 살던 부부도 한순간에 이별을 하기도 한다. 유독 그런 방송들이 늘어나서인지 사랑에 대한 감정의 무조건 적인 약속 자체가 의미없는 것이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이럴 거면 혼인서약 같은 거 말고, 그냥 가까운 지인과 가족들 몇몇 보여서 따뜻한 밥 한 끼 먹고, '가능한 시기까지는 잘 살아보겠습니다. 하지만 저희 둘 모두 감정의 변화에 대해서도 솔직해지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하객 인사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감정에 대한 책임감은 타인이 아닌 스스로에게 적용해야 할 기준이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시간과 공간과 하루를 지배하는 이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사람 일 모르는 것이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내 삶이 여행이라면 내가 가고 싶은, 나의 발길이 이끄는 곳으로 향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삶에 대한 매너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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